1. 다윈과 본질주의의 뒤늦은 종언

2020.03.03 14:11

박제윤 조회 수:32384

1. 다윈과 본질주의의 뒤늦은 종언

Darwin and the Overdue Demise of Essentialism

 

 

다니엘 데닛 Daniel C. Dennett / 황희숙 역

 

 

생물학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적 사고가 본질주의자의 사고를 대체해버렸다. 그렇게 본다면, “본질”이란 말은 이제 철학자가 쓰는 어휘에서도 역사적 맥락을 제외하고는 사용되지 않아야 할 금기어가 되었을까? 실상 이 용어는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순진하게, 즉 비전문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보호색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호프스태터(D. Hofstadter)는 최근 󰡔표면과 본질: 사고를 위한 연료와 불꽃으로서의 유추(Surfaces and Essences: Analogy as the Fuel and Fire of Thinking)󰡕(샌더(E. Sander)와 공저, Basic Books, 2013)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내가 제목에 “본질”이란 단어가 쓰인 것에 대해 묻자 그가 다음과 같이 반응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본질”이란 단어를 들어도 그것을 부정적으로 여기거나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이진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그 단어는, 철학계에서 벌어지는 피곤한 일련의 불가해한 토론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그 단어는 그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쓰는 일상어일 뿐 전문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본질”이란 단어가 “요점”, “핵심”, “중심” 등의 동의어로서 격식 없이 사용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관해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떤 이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그런 식으로 내 책에서 사용되었습니다. (2014년 1월 3일, 사신)

 

호프스태터가 그 단어를 친숙하고 비전문적인 뜻으로 사용한 데 대해 나도 하등 이견이 없다는 점에서는 그가 옳다. 또 “본질”이 그런 일상적 의미도 갖는다고 공표하고 찬양하는 바로부터 그가 거둬들일 탁월한 통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철학자들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불가해한 토론”에 그릇된 경의를 부여하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더구나 더 최근 들어 본질이란 단어의 사용에 대한 신임이 도전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아주 살짝 베일에 가린 대체어들(사실상 완곡 어법들)을 사용하기 시작한 마당이기에 더욱 염려스럽다.

소크라테스가 “모든 F들이 공통으로 갖는 것”, “바로 그 덕분에 그것들이 F들일 수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는 요구를 선도한 이래로, [F와 비F를 가르게 할] 명확하고 예리한 경계선에 대한 이상은 철학의 토대가 되는 원칙 중 하나였다. 플라톤의 형상(forms)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essences)을 낳았고, 그것은 또 필요충분조건들을 요청하는 무수한 방식을 낳았고, 그것들이 자연종(natural kinds)을 낳았고, 그것은 또 구별자(difference-makers, 차이를 빚는 것들)와 이 세상 만물의 모든 집합들의 경계들을 정돈하는 여러 방식을 낳았다. 다윈(C. Darwin)이 나타나서, 생물의 집합들이 영속적이고 확연히 경계 지어진 종류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경계를 갖는 역사적 개체군이며, 자취가 감춰져가는 지협(地峽)들에 의해 다른 섬들에 태고에 연결되었던 섬들이라고 혁명적인 주장을 했다. 그때 철학자들의 주된 반응은 이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하나의 도발로 취급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경계가 흐릿하고 꾸불거리는 실재라는 부분에 우리가 어떻게 일률적인 집합론을 강제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당신의 용어를 정의하라!”라는 말은 철학 토론에서 헌법 전문처럼 자주 나오며, 어떤 방면에서 그것은 모든 진지한 연구의 제1단계로 여겨진다. 그 까닭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시작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체계화한 논증의 기술은 발견의 도구들로서, 직관적으로 확실한(숙고하면 “자명한”) 것일 뿐만 아니라 논증에 의해서도 강력한 것이다. 그것들은 논쟁 중인 불일치를 종종 부정할 수 없게 확고한 방식으로 해소시키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모든 탐구의 목표가 “이상 증명 끝, 이것이 증명되어야 할 것이었다”라는 승리의 종결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클리드(Euclid)의 평면기하학은 정의와 공리, 추론 규칙, 그리고 정리에 대한 또렷한 분리를 갖춘, 그 첫째가는 과시 사례였다. 모든 논제가 그저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길들였듯이 그렇게 철저하게 길들여질 수 있기만 하다면 좋을 텐데! 만물을 증류하여 유클리드식의 순도를 뽑아내고자 하는 염원은 수년간 철학적 과업에 동기를 부여해왔고, 모든 논제를 유클리드식화하고(euclidify) 그럼으로써 만사에 고전 논리를 강제하려는 다른 시도들도 부추겨왔다. 이런 시도들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고, 때로는 마치 다윈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진행되기도 한다. 필립 키처(Philip Kitcher 2009)가 다음과 같이 눈에 번쩍 띄는 예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다윈이 “유형론적 사고(typological thinking)”를 “개체군적 사고(population thinking)”로 대체시켰다고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가 말한 바에 대해 살펴보자. 다윈이 방대한 양의 종내 변이(intraspecific variation)에 대해 간파한 공적에 대해서는 한 세기가 훨씬 넘도록 논쟁의 여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 토론에서는 오늘날에도 종종 그 진가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자연종에 대한 최근 토론들은 크립키(Saul Kripke)와 퍼트남(Hilary Putnam)의 독창적 아이디어에 의해 고무되었는데, 본질주의를 되살릴 수 있다고 종종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종(species)이 자연종이라면, 그런 부활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크립키와 퍼트남은 대체로 자신의 논의를 원소와 화합물에 국한시켰다. 그리고 합당한 근거와 신다윈주의의 통찰 하에서 본다면, 미세 구조의 본질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찾는 일은 성사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원자번호가 원소에 대해 했던 역할을 어떤 유전적 또는 핵형 형질(karyotypic property)도 종에 대해 해줄 수 없다.

 

“자연종”이란 용어를 철학에 재도입한 사람은 콰인(Quine 1969)이었다. 적어도 그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종(kinds) 중에서 단지 몇 종만이 현대판 본질로 간주될 자연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필시 자신의 그러한 공식 승인이 어떤 식으로든 속 편한 본질주의로 복귀하는 자연주의자의 축복으로 해석되는 것을 유감스러워했을 것 같다. 콰인은 “녹색 물체들, 또는 적어도 녹색 에메랄드는 하나의 종이다” (p.116)라고 하면서, 에메랄드는 자연종일 수 있는 반면 녹색 물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이 인정했음을 공표한다. 색채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분명히 자연종이 아니다. 이 진화의 산물은 훌륭하고 깔끔한 정의를 찾는 데 여념이 없는 철학자들이 그 범주를 만들고자 할 때, 그들을 몸서리치게 만들 만큼 엉성한 경계선을 용인하고 있다. 만약에 어떤 생명체의 생명이 달이나 푸른 치즈, 자전거 등과 함께 하나의 그룹으로 총괄해 취급된다면, 당신은 대자연이 이런 것들을 “직관적으로 같은 종류의 사물”로 “간주하는” 방도를 마련해주리라고 꽤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학이라는 추상적 영역 밖에서도 본질주의가 어떻게든 작동되게 될 수 있다는 공통된 무언의 추정이 형이상학적이지는 않으나 하나의 방법론적인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 추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경이로운 도구인 고전적 2치 논리학을 갖고 있으며, 그 사용법을 익히는 데 우리의 시간을 바친다. 그것은 유클리드가 분류한 기하학 요소들이 갖는 그런 분명한 경계가 없이는 작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용어들에서 모든 모호함과 불분명함을 유클리드식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작업가설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실행의 기미를 지닌 것들 중 하나로 다윈식의 개체군적 사고를 용인은 하되, 우리가 선택한 주제에의 적용은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통상적인 업무로 돌아갈 수 있다.

이 편견은 철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고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도 있다. 다윈식의 관점에 의해 위협받는 가장 통상적 관행 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반대자에 대해 선언지 소거 논변(disjunction-elimination arguments)을 쓰는 것인데, 그것은 “할지 말지 선택의 태도를 분명히 해라”라고 부를 수 있는 책략의 일종이다. 나는 먼저 철학자들이 왜 그렇게 자주 그 책략을 선호했는지를 보여준 다음에, 많은 아니 거의 모든 자연주의적 맥락에서 그 책략의 포기가 왜 현명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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